홈 > 진리/복음 > 복음의소식
복음의소식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비유를 통한 설명

에바브로 0 349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비유를 통한 설명

어느 촌락에 한 가정만 빼고 모든 가정의 젊은 남자들이 아내를 학대하고 바람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촌장과 노인들은 모여서 법을 제정 했습니다.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는 자는 마을 법에 의해 처벌할 것이다. 

 

그 법이 제정된 뒤로 바람피우는 남자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자들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바람 못피우는 것을 포르노 영화를 보고 도박을 함으로써 메꾸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정의 남자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늘 웃음이 넘쳤습니다.

 

마을 촌장과 노인들은 어떻게 하면 마을의 가정들이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그런 가정이 될 수 있을까

매일 모여 논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 가지 법을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도박을 하지 말것. 포르노 영화를 보지 말것. 아내의 말을 들어줄 것"

 

그러나 아무리 수백가지의 법을 만들어도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법 똑똑해 보이는 노인이 마치 해법을 찾은 듯 말했습니다.

"모든 법을 폐지하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법을 만들면 어떨까?"

 

사람들은 그럴싸해서, 박수를 치며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그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젊은이들이 되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마을 촌장들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가정의 남편을 본보기로 해서 여러가지 행동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일주일에 세번 설겆이 해줄 것. 사랑한다고 수시로 말할 것. 용돈의 십분의 일은 아내를 위해 쓸것, 청소도 해줄 것. 주기적으로 꽃을 사 줄 것 등등"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모든 마을 사람들이 제법 열심히 법을 지켰지만,

여전히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오직 한 가정만이 행복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사랑은 법으로 제정해서 강제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를 사랑하는 그 사람은 오히려 마을의 법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는 자발적으로 해왔던 것인데, 갑자기 강제성을 띄게 됨으로 오히려 아내와의 관계가 어색해진 것입니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사람들, 곧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딤전 1:9 "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마음에 사랑의 법이 새겨진 자에게는 문자로 찍힌 강제적 행동규범이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로 찍힌 행동규범이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참고사항으로 유익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어떤 계기를 통해서 큰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일주일에 설겆이 3번, 청소를 하루에 한번씩 도와줄 것과 같은 법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 이상의 헌신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을 노인들은 그 법을 폐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자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일단의 중년들이 절대로 폐기할 수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 법을 들여다 보십시오. 얼마나 유익한가?

바람피지 말라, 설겆이 도와주라, 청소를 도와주라, 용돈의 십분의 일은 아내를 위해 써라, 일주일에 한번씩 아내에게 꽃을 사다주어라...이렇게 좋은 법을 왜 폐기합니까? 이것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노인들은 이 말에 두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이제 남편들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그런 법이 뭐가 필요하냐, 그냥 아내를 사랑하는데 참고사항으로 사용하는 정도로 내버려두자라고 주장하는 무리와

 

아니다, 여전히 그 법은 유용하고, 그 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이 둘은 몇 일을 싸웠지만 끝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은 두 편으로 나뉘게되었습니다.

 

마을 북쪽은 법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살게되었고

 

마을 남쪽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살게되었습니다.

 

북쪽 마을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기보다는 그 법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점점 사랑은 실종되고, 그 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충실한 남편이라고 자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법을 지킨 남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게 남편구실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을 느꼈던 부인들은 다시 율법적이된 남편들이 너무 의무적이고 메마르게 느껴지면서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때문에 큰 문제는 못느꼈습니다. 행복하지는 않아도 일단 힘들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겉으로 봐서는 그런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매우 아내를 사랑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남쪽 마을 남편들은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법들을 보면서 아내를 사랑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잘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자유했지만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스스로 아내를 섬겼습니다. 아내들은 행복했고, 가정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쪽과 북쪽의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은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법도 안지켰습니다. 이들은 방종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이 법이 없어서 저렇게 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법한 자가 된 것은 모두 남쪽의 사람들 책임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가장 행복한 가정은 남쪽 가정들이었습니다.

 

----------------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율법과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금방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고전 9:20-21)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엇일까요?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의 법을 율법을 더욱 강화시킨 법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문자를 나열한 어떤 법조문이 아닙니다.

문자로 나열한 법으로는 결코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구원을 받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님이 되실 때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오셔서 진정으로 나의 주님이 되실 때, 이 사람은 더 이상 율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살아계신 성령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되신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계명을 준수함으로 주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그분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내 삶의 주인되시는 삶입니다.

몇 개의 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그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법을 준수함으로 신앙생활하는 패러다임이 아닌,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번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으로 산다고 했는 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율법과는 달리 정죄하고 죽이는 법이 아니라 살리는 법이고

성령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 다음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 - 7)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직업, 결혼, 자녀 교육, 나의 꿈 ...그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주님되심을 어떻게 법으로 다 나열해놓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그리스도가 주님인 사람과 똑같이 되려면 몇 개의 법이 있어야 가능할까요?

수천가지를 만들어도 결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결코 문자로 새겨질 수 없으며 그것은 마음에 새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위 개혁주의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모여서 한참을 의논한 끝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살펴보니 유익한 것이 많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생활규범으로 지켜야 한다!"

 

그들의 말은 매우 그럴싸하지만, 결국 사도 바울이 전한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의 차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내를 위하는 각종 법들이 좋은 참고가 되겠지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백가지 강제법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사랑을 대치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수백가지 법을 주면서 사랑대신 이 법을 규범으로 삼으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사랑의 위대한 장점인 자발성이 깨지는 것입니다.

 

거듭말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활규범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닙니다.

아니 율법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만한 신학자들이 바울과 같은 레벨에서 자기 칼라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복음이 될 뿐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활규범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전 영역에서 주님이 되시고,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고 그 외에 모든 행동규범은 거기에서 응용된 것입니다.

바울 서신이 그렇고 베드로의 서신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권면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삶 속에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아니시라면,

당신의 모든 종교적 삶과 율법적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요 13:34,35)입니다.

 

그것은 결코 문자로 된 율법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님되신 사람에게 가능하고

마음에 새겨져야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지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힘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그들은 여전히 앵무새처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바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율법과 복음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아직도 강단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역행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을 설교하며

도덕법을 넘어서서 십일조니 주일성수니 심지어 음식물법까지 지켜야 함을 역설합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 구절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부디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갈 2:19 - 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출처 : 기독교개혁포럼  최야곱
번호 연재 목록 조회
연재글이 없습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