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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형제들

승송아휴(乘松雅休)

교회지킴이 0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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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송아휴(乘松雅休)(노리마쯔 마사야스)

승송아휴(乘松雅休)(노리마쯔 마사야스:1863-1921)는 1863년 7월 12일 일본 에이메(愛媛) 현 마쓰야마(松山)시에서 지주인 노리마쯔(乘松忠次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며, 3남매 중 유일한 남자로서 가문을 이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자랐다. 마쓰야마 중학교에 다닐 때 심한 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노리마쯔는 기도를 통해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17세 때 제1기생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마쓰야마(松山 久松家) 사숙에 진학하여 동향 청년들과 같이 공부했다. 그 후 가나가와(神奈川)현 현청의 관리가 되어 관계에 큰 뜻을 품고 일을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 24세 때인 1887년 1월 2일, 새해 첫주에 전에 하숙하였던 아주머니의 권유로 그녀가 다니던 일본 최초의 교회인 요코하마해안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하여 신도가 되었다.

한창 교회가 부흥이 되던 때에 이나가끼(稻垣信)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청년 전도자로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입신출세의 길인 관가의 등용을 포기하고 메이지(明治) 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선배인 기다하라(북원미도) 목사님이 요코하마교회를 사임하자 목사님이 계시지 않았던 니혼바시(日本橋) 교회에 설교담당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 문제가 일어나 결정적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일본 메이지학원 대학신학부에 있을때 폴리머스형제단 소속의영국인 브랜드(H.G.Briend)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신학부를 중퇴하고 조선선교사로 나가기를 작정하고 출발준비를 하였다.그는 1896년 조선의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된다.노리마쯔는 기독인으로써 가책을 느끼면서 조선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여 5년간 일본 곳곳에 전도여행을 하다가 1896년 한국 전도를 결심하게 되었다


소망을 잃은 조선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고자 다짐하며 그해 12월23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고 일본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해외선교사역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역사적인사례다

  그가 한국에 온 시기는 정치승송아휴(乘松雅休)상황이 혼미를 거듭하던 때였으며, 1894년 동학난과 청일전쟁이 끝나고 조선왕조는 붕괴의 직전에 있었으며, 열강의 각축전이 전개되는 시기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시기에 일본인에 대한 배일사상이 절정에 달한 때 무모하게 한국에 왔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 진고개에서 한국가옥에 자리잡고 처음 접촉한 사람은 일본어학교 학생이었던 조덕성(曺德成)을 만나서 한국말을 배우며 곧 노방전도를 하였다. 이듬해 11월에 서울에서 처음 만찬예배를 드렸고 이때 신태일(申泰一), 윤태훈(尹泰勳) 등이 침례를 받았다.

1898년 6월에 일본에서 브랜드 부부가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서소문에 거주하게 되자 브랜드 형제님 집에서 기거하면서 서울, 경기도, 충청도 지방으로 전도하다가 1900년 8월 9일 서울을 브랜드 선교사에게 맡기고, 복음의 불모지인 경기도 수원으로 옮겨갔다. 그 이유는 한국 사람 속에 토착하여 한국 사람을 몸으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는 그를 가리켜 ‘마쯔야마는 한국에 전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사랑하러 왔다’는 말들을 하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가옥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 그릇을 쓰며, 심지어 태어난 아들에게도 일본말보다 한국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자신도 한국말이 유창하여 한국 사람들이 그가 일본말을 쓰면 ‘당신은 어디서 일본말을 배웠느냐?’고 물을 정도로 스스로 한국 사람이 되어 한국 사람의 생활을 하였다.

이후부터 수원은 그의 복음전도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1899년에 결혼하여 한국에서 2남 2녀(田信, 朝子, 順子, 義生)를 낳았으며, 1908년에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아내 사토 츠네코(佐藤常子, 1875~1908)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이듬해에 재혼하였다. 그는 이러한 가정의 불행 속에서도 계속 전도에 힘을 썼으며, 그 결과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곳곳에 착실히 결실되어 갔다. 그러나 무리를 거듭한 그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가서 결핵병에 걸렸고 더 이상 전도생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요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했지만, 그는 죽기까지 6년 동안 쉬지 않고 일본 곳곳으로 전도여행을 다녔고, 한국에도 세 차례나 방문하였다.

그는 일본의 가나가와현 오다하라(小田原)에 거처를 정하여 그때 그 모임을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라는 이름으로 관청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후 공식으로 불려진 것이 일본, 한국에 이 모임의 명칭이 시작되었다.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21년 2월 12일에 그는 한국에 그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59세, 한국 전도를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였다. 이듬해 1922년 4월 14일 그의 맏아들이 유골을 가지고 와서 한국 형제들의 슬픔 속에서 츠네코가 잠들어 있는 수원에 묻었으며 그날 수원에서는 대집회가 개최되었고, 또 그의 후계자이며 한국인 전도자의 한 사람인 김태희(金太熙)에 의해 한문으로 쓴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전면

 在主故乘松兄妹記念碑


生爲主 死爲主 始爲人 終爲人 其生涯忠愛己 帶主使命而
舍其一切所有 夫婦同心傳福音于朝鮮 數十年風霜其苦何如
心肺疼痛 皮骨凍餓 手足病敗 其於朝鮮犧牲極矣 然動靜惟賴主
甘苦不改樂 其生涯祈禱與感謝也 得我多兄弟 同會于生
主名得榮 其生涯苦而亦榮矣 臨終口不絶朝鮮兄弟
願遺其骨於朝鮮 此所以爲我等之心碑而 至於主在臨之日也矣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시작도 사람을 위해 마감도 사람을 위해,
  그 생애 충애(忠愛)뿐. 몸소 주의 사명을 띠고
  그 모든 소유를 버리고, 부부 한 마음으로 복음을 조선에 전하였노라.
  수십년 풍상에 그 고통이 어떠했으랴.
  심폐(心肺)의 모진 아픔 피골이 얼고 주려, 수족은 병으로 이즈러져,
  그 조선에서의 희생 극심하도다. 그러나 그 거동이 오직 주를 의지하여
  쓰고 단 즐거움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 생애는 기도와 감사만이로다.
  우리의 많은 형제를 얻고, 주와 함께 모이고
  주의 이름 영광 얻었나니, 그 생애 고난이요 또한 영광이로다.
  임종하는 말에 조선 형제 일을 잊지 않고,
  그 뼈를 조선에 남기기를 원하였노라. 이에 우리의 심비(心碑)를 삼는 까닭이며,
  주의 재림날에 이르리로다』




 

기념비후면


文久三年 七月 十二日 乘松雅休兄 生於愛媛顯 松山藩士
明治 二十年 一月 在神奈川顯 爲屬官中信基督 遂入東京
明治學院修神學後 離敎派在主傳道仝二十九年 十二月 渡鮮傳道
三十二年 與常子姊(姉 같은 글자)婚爲主同辛苦仝姉生二男二女
同 四十一年 二月 十九日 就眠於 水原 大正 三年 同兄以病歸相州小田原
然往往 來訪鮮聖徒 仝十年 二月 十二日 遂就眠吁畧(略같은 글자)誌此




참조: 일본기독교사, 土肥昭夫1991
       일제의 종교침략사, 한석희, 1990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전도자, 한석희
이이누마지로 공편, 1990
       韓國近い昔の旅, 神谷丹路, 1996

       감리교뉴스한국교회사(87)

       엠마오성경학교

       열린문선교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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