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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형제들

다비(J.N. Darby)

교회지킴이 0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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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넬슨 다비(1800-1882)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일컫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타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부직을 1827년에 사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벨렛(J. G. Bellett), 허친슨(F. Hutchinson), 파넬(Lord Congleton-John Parnell), 그로브스(A. N. Groves), 크로닌(E. Cronin), 스토크스(W. J. Stokes) 등 6명의 신앙동지와 함께 성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기성 교계와 결백했다. 이들을 가리켜 세칭 ‘더블린의 7형제’란 부르며, 교회 역사상 ‘형제 교회’의 시발점이 된다.


이들은 교파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하여 형제와 자매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플리머스 형제 교회(Plymouth Brethren Assembly)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채프만(R. C. Chapman)이 반스테플에서, 크레익과 조지 뮬러가 브리스톨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뉴톤의 매부이며 저명한 본문 비평가였던 트레겔레스(S. P. Tregelles)가 1836년에 영접되었다.


다비는 그리스도인의 간증(The Christian witness)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다비의 성경주석(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도 이 무렵 출간되었는데 5권으로 되어있는 이 저서야 말로 성경학자들에 의해 극찬을 받고 있는 불후의 걸작이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 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유럽 각국어에도 유창해서 그가 번역한 불어 성경은 프랑스 전역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새번역으로 불리는 그의 영어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기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밖에도 독일어, 이태리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논문과 설교는 윌리암 켈리(W. Kelly)가 편집하여 32권으로 집대성했다.

그는 수백권의 저술을 해냈으며, 원어문 성경 신구약을 영어로, 독일어로, 불어로 번역했고, 신약을 이탈이라어로 번역했다. 그는 북미와 수십개국에 전도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형제운동의 주된 인물이라고 인용되고 있으나, 1838년 이후 폐쇄적 입장으로 나아갔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식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 








죤 넬슨 다비

 

죤 넬슨 다비 형제는 킹스카운티, 리프 켓쓸지역의 죤 다비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웨스트민스터에서 그가 출생한 해는 1800년도이었다. 그 해 그는 앵글로-캐톨리시즘의 대가인 E. B. 푸시가 출생한 해이고 두 분의 사역도 같은 해에 끝났다. 넬슨이란 이름은 그의 삼촌인 헨리 다비가 넬슨 제독 휘하의 군대사령관으로 나일전투에서 유명해진 것을 상기하여 지어졌다. 그는 웨스트미니스터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이어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트 대학에 입학하여 우등생으로 1819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후에 아이리쉬 대법 원에 취직했으나 얼마 후에(1815) 마기 주교로부터 보조 신부로 임명되었다가 다음해에 정식 신부로 서품(敍品)되어 캘라리의 윅클로 교구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그 후 자작미망인 파워스코트 여사가 브레이 근처 자기 저택에서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를 통하여 다비 형제는 그로브스, 파넬 등을 사귀게 되였고 또한 그의 친구 벨렛을 통하여 에드와드 크로닌과 더블린에 사는 다른 뜻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등한시 되었던 성령님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소망 등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비 형제는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성서적 관점에 동조하며 1827년에 그의 사제직을 사임하였고 다음 해에는 더블린에서 위에 기록한 친구들과 함께 떡 떼는 것(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기성 종교계로부터 완전히 격별하였다. 그는 또한 아일랜드에 있는 프랜시스 윌리암 즉 헨리 뉴맨의 동생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윌리암은 밸리를 대학에서 최우등을 한 학생인데 옥스포드에서도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대법관인 다비 매형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일할 때 다비 형제의 인격과 신앙에 감동하여 애란의 성직자를 소개하여 여러 사람들이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다비형제는 뉴톤이라는 프리머스 사람을 방문하여 복음적인 호커 형제와 애란의 사제였던 분리원칙 주장자인 워커 형제와 만나게 되었다.

1832년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처음으로 영국에서 형성되었다. 해리스 신부도 프림스톡 교구책임을 사임하고 형제들과 함께하였다. 그 후 채프만 형제와 죠지 뮬러형제가 함께 사역하여 반스태플과 브리스톨에서 각각 모임을 이끌었다. 이때의 특징은 의식을 탈피한 단순성과 헌신으로서 그리스도인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1837년에 다비 형제는 “간증”을 구라파 대륙으로 가져갔고 스위스에 있는 감리교도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여 1840년에는 수개의 불어(佛語)를 사용하는 모임이 형성되었다.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소망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성서개요를 출판한 것도 이때 이다.

1845년에 프리머스를 재방문하고 아직도 사역과 성화 및 휴거등에 관한 문제가 비성서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음을 보고 뉴톤이 이끄는 모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모임을 재편하였다. 불란서에서 선교하여 큰 성과를 얻고 1853년부터 독일에 있는 침례교도 안 에서 사역하여 둣셀돌프나 옐버휄트 등에 여러 모임을 개척하였다. 여기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엘버휄트 생경”이 출간되었다. 그는 불어성경도 만들어 보급하고 영어성경도 번역하여 1890년에 출간하였다. 1859년부터는 카나다, 미국, 웨스트인디, 뉴질랜드, 화란, 이태리 등에서 전도하였다. 50년간 그는 성서에로의 환원운동에 전심전력하였다. 그의 성서개요는 매우 수준높은 저서로서 감리교도들이 갖고 있는 웨슬레 연구서와 동등한 평판을 당시의 신학생들에게 받고 있었다. 그의 저서는 다소 반항적인듯 하나 그의 교역 생활은 아주 성결했고 그의 찬송시는 심오하고 아름답다. 세밀한 면에서는 약간 부족을 보였으나 그 세대에서 그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단독으로 봉사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항상 천주 교회의 타락과 면죄부의 발행 등에 대해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의 교회의 근본적인 연합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다비 형제는 많은 찬송을 작사 하였다. 그 중에는 “들으라 만의 외치는 소리를”, “오 주여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찬미합니다.”“ “위에 있는 성도의 휴식” “내 영혼아 깨어라 네 하나님이 너를 명하신다” “광야 같은 이 세상” 등이 있다. 시집도 출간되었다. 그는 1882년 4월 29일에 주님께로 갔다. 부어네마우스에서 임종하였다. 그는 고상하고 품행이 단정하였으며 진실하였다. 그는 매일 오후에 목회심방을 하였다 한다. 그는 말씀 안에서 살았고 “성서적 사고를 주장하였다.

 

햇불  197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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